상반기 조선용 후판 공급가격 협상이 진행 중인 가운데 철강업계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지난해 철광석과 원료탄 가격이 급격하게 오른 탓에 제조원가는 높아졌으나, 하반기 공급가격은 결국 인하됐다. 더욱이 조선업계는 올해 상반기 공급가격도 인하를 요구하고 있어, 협상에 어려움이 많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철강업계는 지난해 하반기 들여온 고(高)원가 원료를 털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추가 인하는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내 연간 후판 수요 800만 톤 가운데 조선용이 차지하는 물량은 500만 톤(수입 포함) 이상이다. 단일 산업 규모로는 건설강재인 철근과 자동차강판을 비롯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다만 조선용 후판은 비조선용 대비 수익성이 낮은 탓에, 물량이 많아도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업계 관계자는 “조선용 후판은 팔면 팔수록 적자”라고 평가했다.
조선업계 입장에서도 후판 공급가격 협상 결과에 따라 수익성이 갈릴 수 있어 이목이 쏠리고 있다. 통상 선박 건조 비용 가운데 후판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수준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선박 가격 상승과 인건비 등을 고려해 15~20% 수준으로 추정된다.
▣ 1분기 K조선 수주액 세계 1위…국산 후판 판매량은 고꾸라지고 중국산은 늘어
철강업계는 국내 조선산업 회복을 통해 조선용 후판 판매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조선업계의 수주 호황기를 맞이해 건조량 또한 늘어나 국산 후판 판매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라며 “그러나 실제 제품 판매는 증가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중국산 저가 후판 물동량이 크게 늘며, 국내 조선산업 회복의 수혜를 누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례로 올해 1분기 우리나라의 선박 수주액은 136억 달러로 중국을 앞지르면서 세계 1위를 달성했다.
국내 조선업계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산 후판 수입을 대폭 늘리며 제조원가를 낮추는 방식을 채택한 상황이다. 이와 함께 최근 중국 철강업계의 한국 조선사 대상 후판 판매 프로모션도 강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대형 철강기업 관계자들이 한국 조선사에 방문해 후판 판매와 적용 관련 논의를 진행했다는 후문이다.
조선업계가 부활의 신호탄을 쏘며 축배를 들고 있는 와중에 국산 조선용 후판 판매량은 감소하고 있다. 조선용 후판 판매량은 2021~2022년 연간 360만 톤을 기록했으나 지난해에는 건조량 회복에도 불구하고 330만 톤대로 도리어 감소했다.
반면 중국산 후판 수입량은 2021년 약 44만톤, 2022년 약 81만 톤에서 지난해 130만 톤으로 급격하게 늘었다. 올해 1분기 기준 수입량도 약 38만 톤을 기록해 전년 대비 10% 늘어난 상황이다. 이와 함께 중국산 블록 직수입량도 증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 고통 분담은 철강업계만?…“산업 보호를 위한 배려 필요해”
과거 철강업계는 조선업계가 2010년대 불황의 시기를 보낼 당시 조선용 후판 공급가격을 안정화하며 상생의 의지를 보였다. 2019년 3월에는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가 보도자료를 내고 조선사들의 경영 정성화 시기까지 가격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조선업계는 상생을 요구했으며 당시 철강업계는 이와 같은 요구에 수긍하며 가격을 동결하거나 인상을 미룬 바 있다.
이에 철강업계는 과거 사례처럼 조선업계의 상생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후판 제조사들은 철광석과 원료탄 등 철강원료 가격 강세와 전기요금 인상 악재에도 공급가격 인하에 동의했다. 철강업계는 지난해 하반기 기준 조선용 후판 공급가격을 톤당 80만 원 중후반대까지 인하하며 적자 판매를 감내했다. 당시 국산 후판 유통가격은 톤당 100만 원 후반대를 나타낸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 조선용 공급가격 인하로 인해 제조업계의 경영실적 악화가 가중됐다”라며 “올해 연초까지 급격하게 오른 원료가격도 상반기 후판 제조원가에 부담을 더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철강업계는 올해 상반기 조선용 공급가격 인하는 사실상 불가하다는 입장을 알렸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철광석과 원료탄 가격이 하락한 것은 맞다”라면서도 “단,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연초에 급격하게 오른 원료가격이 아직까지 제조원가에 반영되고 있으며, 최근 하락한 원료가격은 향후 하반기 가격 협상에서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반면 국내 대형 조선사들은 올해도 중국산 수입을 확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협상력을 높이고 있다. 특히 중국산 저가재를 이용한 가격 인하 압박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철강업계는 국내 후판 시장과 조선산업 관련 하청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업계의 고통 분담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저가 후판 물동량 증가로 인해 국내 후판 제조사의 적자는 확대되고 있으며, 블록제작 기업 등 관련 산업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라며 “과거 조선업계가 힘든 시기를 보냈을 때 철강업계가 양보한 사례처럼, 국내 산업 보호와 어려운 환경 극복을 위한 상생의 길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포스코 후판 제품. 포스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