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저만치 다가왔다. 이맘때면 유난히 기다려지던 유년(幼年)의 추석이 생각난다. 총총히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어 가면 코 흘리게 소년이 자리한다. 지금처럼 추석이 성큼 다가오면 소년의 마음도 덩달아 설레었다. 손가락으로 세는 날짜가 줄어들수록 기다림도 절정으로 치달았다. 추석도 기다려졌지만 소년이 기다린 것은 객지로 돈 벌려간 누나였다. 그래서 추석 전날이 되면 동구 밖 버스정류장에서 오매불망 누나를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
도시 물이 흠뻑 젖은 누나는 예쁜 옷을 입고 고향에 왔다. 사투리는 전혀 쓰지 않고 표준말을 하며 동생들을 안아주는 모습은 멋있고 세련되어 보였다. 그리고 누나의 선물 보따리에서 나온 추석빔을 입고 또래들에게 자랑하며 뽐내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추석날이 되면 친지들이 모여 차례를 지냈다. 햅쌀과 햇과일로 차린 풍성한 차례 상을 보며 아이들은 차례는 뒷전이었다. 차례 음식에 더 관심을 가졌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나지만 가난한 시절은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추석을 기다린 이유 중 하나다.차례를 지낸 후 친지들은 다 같이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 성묘했다.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을 지나고 졸졸 냇물 소리가 정겨운 개울을 건너면 양지바른 언덕에 산소가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한 경치 좋은 곳에서 할아버지는 자손들을 반갑게 맞았다. 일찍 돌아가셔서 자식들이야 알겠지만 손자들은 할아버지 얼굴을 몰랐다.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께 절을 하고 어른들은 식구들의 건강과 안녕을 빌었다. 이처럼 조상을 기리고 친지들이 모여 정과 사랑을 나누었던 유년의 추석은 잊히지 않는다. 추억의 앨범 속에서 으뜸으로 자리한다. 누나가 객지로 간 것은 돈을 벌어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누나 덕분에 공부를 했고 세월은 흘러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동안 풍습도 세월 따라 많이 바뀌었다. 디지털과 IT 기술이 발달한 요즘은 더욱 그런 것 같다. 차례를 휴가지에서 지내는 것이 특이한 일이 아닌 세태가 되었다. 옛날에는 엄두도 못 낼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조상님들이 알면 크게 노할 일이지만 후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차례보다 가족여행이나 휴식이 우선인 시대로 바뀐 것이다. 추석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로 세태는 급변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즐거웠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 추석이었다. 특히 며느리들의 수난(受難)이 심했다. 먼 길을 와 피곤한 몸으로 차례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며느리들은 명절이 지옥과도 같았을 것이다. 즐거워야 할 명절이 힘겨운 노동으로 점철되었다면 불만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며느리들은 묵묵히 그 일을 감내하며 전통을 지키려 애썼다. 그 노고를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위로해야 할 남편들은 음주로 무단히 속을 썩였다. 그런 남편들의 행동은 며느리들이 오랫동안 두고두고하는 타박거리가 됐다. 잘못이 컸기에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무심한 세월의 흐름은 소중한 사람과 이별하는 아픔을 낳았다. 엉덩이를 토닥이며 강아지라고 어르던 할머니, 무거운 지게 짐을 지고 가정을 책임졌던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다. 모두 뒷산에 누워계신다. 늘 사랑으로 보듬어주시던 당신들의 부재는 한참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애틋한 그리움은 명절이 되면 더욱 간절했다. ‘자식이 효도를 하고 싶어도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는 중국의 고전에서 깨우침을 얻는다. 한 번 지나가면 그만인 세월이다. ‘생전에 부모에게 효도를 많이 하라’는 아랫사람에 대한 가르침이 못내 부끄러운 것은 내가 죄인이어서 그렇다. 옛날부터 추석은 이웃에 대한 베풂으로 훈훈했다. 사람들은 살림이 어려운 이웃 집에 햇곡식과 채소로 음식을 장만해 배불리 먹도록 도와주었다. 노비, 거지들도 고향에 가서 성묘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명절 풍습이 세대를 이어오며 많이 바뀌었지만 본질(本質)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이다. 우리 업체들이 좋은 본보기다. 추석을 맞아 이웃들에게 베풂을 아끼지 않는 모습은 미소가 저절로 나오게 한다. 어린 시절 추석이 되면 거지들이 유난히 마을을 많이 찾아왔다. 그 거지들에게 음식을 아낌없이 나눠주던 우리 어머니들 모습이 우리 업체들의 베풂 속에 투영된다. 가난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따뜻한 마음은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던 그 옛날 추석 이야기는 여기서 마친다. 또 다른 이야기로 기억 될 추석이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