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간압연강판 수입대응재를 국산 정품 열연강판으로 둔갑해 판매하는 사례가 적발돼, 철강업계 안팎으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유통가공시장을 통해 열연강판 수입대응재가 정품으로 둔갑해 판매됐으며, 해당 제품을 통해 만들어진 최종 생산재가 불량을 일으킨 것으로 파악됐다.
절단 및 가공 이후 정품과 수입대응재를 맨눈으로 구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악용한 사례로, 이러한 행위가 지속된다면 국산 정품 철강재의 신뢰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함께 최종 소비자를 기만하는 일부 유통사에 대한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 확인했다지만…납품받은 적 없는 제품의 밀시트도 도용
철강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0일 열연강판 최종 소비자인 A사는 열연강판을 가공해 제품을 제작하는 도중 품질 불량을 발생하자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에 원자재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해당 업체는 교량난간과 방호책, 휀스를 생산하고 있다.
A사는 원자재 품질 불량 발생 이후 열연강판 판매업체로부터 밀시트를 수령했으나, 제품에 대한 의구심이 지속됨에 따라 외부 기관에 검사를 의뢰한 상황이다.
A사가 확인한 시험결과표. 독자 제보.8월 27일 시험 결과를 통해 A사에서 제출한 시료에서 탄소(C)가 허용 범위를 훌쩍 넘은 20%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철강업계 관계자는 “정품은 15% 이하로 관리돼야 한다”라며 “해당 수치는 생산공장에서 스펙상의 문제로 불량 제품으로 취급받는다”라고 전했다.
이에 A사에 납품된 열연강판은 정품인 SPHC 강종으로 둔갑한 수입대응재인것으로 드러났다. 당초 A사는 SPHC 강종 열연강판을 구매했다. 다만 품질 불량 발생 이후 밀시트 확인을 통해 SPHC 제품이라고 재확인했으나, 시험 결과를 통해 수입대응재를 납품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A사 관계자에 따르면 고로사 열연공장에서 출하된 열연코일은 코일센터를 거친 이후 B유통사로 넘어갔으며 이후 C유통사로 다시 이동한 제품을 납품받은 순서다.
이에 A사 관계자는 품질 불량 발견 당시 제품 자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열연코일을 제조한 고로사에 항의했으나, 고로사 자체 확인 결과 C유통사가 A사에 정품이 아닌 수입대응재를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A사 역시 열연강판 제조사와 B유통사의 문제가 아닌 것을 인정했다.
C유통사는 B유통사가 과거에 참고 자료로 공유한 밀시트를 이용해 수입대응재를 정품으로 둔갑시켰다. 특히 밀시트에 해당하는 열연코일은 애초에 B유통사에서 C유통사로 판매조차 되지 않은 사실도 확인됐다.
C유통사는 A사에서 불량 제품에 대한 조사를 위해 시료를 요청했으며, 보유한 재고 중 샘플을 채취해 보냈으나 혼동이 있었다고 해명한 상황이다. 이와 함께 회사의 대응 실수로 인한 부분을 인정하고 A사와 벌어진 일들을 정리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C유통사의 해명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은 상황이다. A사 최종 제품의 품질 불량이 발생했으나, 원자재 성분 분석의 시료를 불량이 발생한 최종 제품이 아닌 C유통사가 보유한 재고를 보내줬다는 해명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진은 포스코가 생산한 열연 제품. 포스코 제공.철강업계 관계자는 “수요가들이 납품받은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면, 보유하고 있는 제품을 검사해야 명확하게 나오지 않겠냐”라며 “구매한 곳에 품질 불량을 알리고 샘플을 요구하면 어떤 샘플을 보낼지 알 수 없으며, 이는 상식적이지 않은 해명”이라고 말했다.
이에 철강업계는 C유통사가 상황을 피하기 위한 단순한 변명을 했을 뿐이며, 전형적인 수입대응재의 정품 둔갑 사례로 보고 있다.
■ 맘먹고 속이면 당해낼 재간 없어…국산 철강 신뢰도 하락할까 우려
철강업계는 이번 적발 사례가 열연강판 정품과 수입대응재를 맨눈으로 구별할 수 없는 상황과 일부 유통사의 밀시트 도용 등이 겹치며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상 열연코일은 제품 출하 이후 코일센터에서 가공된 이후 2차 유통 단계로 넘어가는데, 절단 및 가공된 열연 제품은 정품과 수입대응재를 구별하기 어렵다. C유통사의 사례처럼 참고자료로 받은 밀시트를 수입대응재의 정품 둔갑 판매에 악용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또한 국내 철강 수요가 부진을 겪으며 제품 유통가격이 하락하자, 정품과 수입대응재 유통가격의 갭을 이용한 사기 행각이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국내 시황 부진으로 제조사와 유통사 모두 어려운 상황”이라며 “와중에 수입대응재의 정품 둔갑을 통해 2차 유통이 돈을 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시장에 불법적인 행위를 부채질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C사의 사례처럼 일부 유통사들은 수요가에게 정품 열연강판을 시중 유통가격 대비 다소 낮게 제시한 뒤 수입대응재를 공급하며 수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와 함께 철강업계는 수입대응재의 정품 둔갑으로 인해 국산 철강재의 위상과 신뢰도가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앞선 경쟁력과 뛰어난 기술력으로 국내 철강사들은 고품질의 제품을 산업 곳곳에 공급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왔으나, 정품으로 둔갑한 수입대응재의 사례처럼 품질 불량으로 인한 인명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후폭풍은 상당한 것이란 의견에서다.
현재 열연강판은 철강 범용재로 국내 대부분 산업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엘리베이터와 방화문 같은 인류의 삶과 밀접한 분야에서도 활발히 적용되고 있다. 품질 불량 발견이 제작 단계가 아닌 사용 단계에서 이뤄진다면 더욱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사기를 당한 업체를 넘어 결국 정품을 취급하는 업체와 사용자, 모든 국민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현대제철이 생산한 열연 제품. 현대제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