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相生)은 음양오행설에서 사물 상호 관계에서 한 사물이 다른 한 사물을 발생시키고 조장시키는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오행에 속한 금(金)은 수(水)와, 수는 목(木)과, 목은 화(火)와, 화는 토(土)와, 토는 금과 조화를 이룸을 의미한다. 음양오행설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둘 이상이 서로 북돋우며 다 같이 잘 살아감을 뜻한다.
상생은 철강산업을 둘러싸고 항상 강조되는 말이기도 하다. 철강 제조와 유통, 가공업체 간의 가치사슬뿐 아니라 소재를 공급하는 철강산업과 이를 사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조선, 자동차, 가전, 기계, 건설 등 수요산업과의 공급망 사슬 전체에서 필요한 것이 상생이다.
그런데 철강재 공급가격 협상시기만 되면 상생 원칙은 사라진다. 각 경제 주체마다 최대의 수익구조를 만들어야 하지만 경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원가 부담이 커졌다는 이유로 항상 가격 협상은 난항을 겪는다. 조선용 후판 가격 협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근 상반기 조선용 후판 공급가격 협상이 진행 중인데 철강업계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에 원료 가격이 오르면서 제조원가가 높아졌지만 조선업계의 몽니에 결국 공급가격은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올해 상반기 협상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조선업계는 이번에도 가격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원가 부담을 반영하지 못한 철강업계는 최근 원료 가격이 등락을 거듭하긴 했지만 현재까지도 원가 부담이 높아져 조선업계의 요구를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가격 협상을 벌이는 대표적인 철강재는 철근(건설), 자동차강판(자동차), 도금·컬러강판(가전), 후판(조선)을 들 수 있다. 모든 품목의 가격 협상이 어렵게 진행되지만 기본적으로 양 업계간 가격 산정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수준에서 협상이 마무리되고 있다. 하지만 유독 후판 가격 협상에서는 극단의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지리멸렬하게 진행된다.
국내 연간 후판 수요 800만 톤 가운데 조선용이 차지하는 물량은 500만 톤 이상이며, 이는 철근과 자동차강판과 함께 단일 산업 공급량 기준으로 최대 수준이다. 올해 조선 업황 회복으로 인해 후판 판매도 늘 것으로 예상됐지만, 좀처럼 판매는 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저가의 수입재 사용이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조선업계가 부활의 신호탄을 쏘며 축배를 들고 있는 와중에 국산 조선용 후판 판매량은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용 후판 판매량은 2021~2022년 연간 360만 톤을 기록했으나 지난해에는 건조량 회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330만 톤 수준으로 줄었다. 그렇다고 조선용 후판의 수익성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판매 감소가 전체 실적 악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HD현대는 1분기 연결기준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8.1%, 영업이익은 48.8% 증가한 실적을 거뒀다고 밝혔다. 조선 자회사인 HF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중공업, HD현대미포, HD현대삼호 모두 괄목할만한 실적 개선을 이뤄냈다. 선가 상승분이 반영되긴 했지만 원가절감 효과도 크게 반영되며 수익성이 월등이 좋아졌다.
반면 포스코그룹 철강사업 부문의 매출은 소폭 감소하고 영업이익은 전년 수준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단순한 비교이긴 하지만 양 산업의 대표업체들의 실적이 같은 흐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조선 업황이 좋아지고 실적이 나아지고 있지만 철강업체들의 부진한 수익성을 무시한 채 다시 후판 가격을 낮춰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상편 제 2장을 보면 ‘유무상생’이란 구절이 나온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함께 사는 대화합의 정신을 강조한 노자사상의 하나다.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데 급급한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볼 경구다.
상생은 생태학에서 파생된 개념인 공존(co-existence)이나 공생(symbiosis)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상생은 갈등과 대립 관계를 화합의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지난해 양 업계는 ‘조선-철강산업 공동 연구용역’을 공동으로 발주하여 산업연구원에서 이를 수행하고 연말 조선·철강산업 공동 세미나에서 용역 결과를 발표했다. 용역과제를 수행한 산업연구원 정은미 본부장은 “조선산업과 철강산업은 주력기간산업으로서 양 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전략적 협력이 중요하며, 단기적인 관점에서의 이익이나 비용 절감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산업간 윈-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로만 외치는 상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