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관세 부과 조치를 통해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구성요소인 흑연 음극재에 대한 새로운 비중국 공급망 구축을 압박하면서 핵심광물을 둘러싼 미-중 간 무역긴장이 흑연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이달부터 중국산 천연 및 인조 흑연 음극재에 25% 관세를 부과할 방침이며, 앞서 지난달에는 2026년부터 중국산 천연 흑연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조치는 지난달 미 재무부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른 전기차 세액공제 관련 최종규정에서 중국산 흑연 금지 적용을 2025년 1월부터 2년간 유예하겠다고 밝힌 이후 나온 것이다.
이와 관련, 컨설팅사 패스트마켓스(Fastmarkets)의 배터리 원료 담당 애널리스트는 “흑연이 미국의 새로운 아킬레스건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국내 전기차 제조업체들이 IRA 세액공제를 받으려면 단기적으로는 배터리 생산에 중국산 흑연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국내 기업들이 새로운 탈중국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면서 최대한 빨리 법망의 허점을 메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밝혔다.
천연 흑연은 전 세계적으로 매장량이 풍부한 편이나, 현재 거의 모든 천연 흑연 가공과 배터리용 인조 흑연 음극재 생산의 98%가 중국에서 이뤄지고 있다.
미국의 전기차 컨설팅업체 뉴 일렉트릭 파트너스(New Electric Partners)의 관계자는 “흑연 음극재는 모든 리튬이온 배터리에 꼭 필요한 필수 구성요소이지만 제조 공정에서 환경 오염물질이 배출되고, 값도 싼데다 중국에서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기에 대안 공급망에 대한 투자가 정당화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 결과, 2022년에 IRA가 통과된 후에도 비중국 전기차 제조업체·배터리 제조업체·배터리 원료 생산업체들은 대안 공급원 확보에 손을 놓고 있었다”면서, “하지만 이제 미 당국이 관세와 단 2년에 불과한 중국산 흑연 사용 금지 유예 조치로 업체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인조 흑연 제조에 쓰이는 침상 코크스(needle coke)의 대중국 순 수출국임을 지적하고, 3~4년 이내에 해당 제조 시설을 배터리용 음극재 분말 제조 용도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으며, 천연 흑연이 캐나다, 모잠비크 등에도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만큼 중국 외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IRA 세액공제 규정하 중국산 흑연 금지 유예가 만료되는 2027년까지 비중국 기업들이 중국의 흑연 음극재 생산 능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따라서 유예 조치 연장 없이는 세액공제 요건에 부합하는 전기차는 거의 없을 것이고, 결국 미국의 전기차 전환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UBS 소속 배터리 전문 애널리스트는 “비중국 전기차, 배터리 및 원료 생산업체들이 이중고에 직면하고 있다”며 “미국 및 유럽 내 전기차 보급 속도가 예상보다 더딘 탓에 비용 감축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흑연 음극재 공급망 구축에 거액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흑연 정제업체 우르빅스(Urbix) 관계자는 “그동안은 비중국 흑연 공급망에 대한 투자가 설득력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너도나도 비중국산 흑연 제품을 찾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뉴 일렉트릭 파트너스 관계자는 “미국이 중국산 흑연에 대한 수입규제를 실시하는 사이 중국은 흑연 또는 흑연 음극재 수출을 제한하여 대미 보복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반대로 공급량을 늘려 가격을 낮춤으로써 비중국 흑연 공급망 구축 사업을 위협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IRA 규정에 부합하는 비중국 흑연 음극재 공급망 구축은 반드시 실행되어야 하고, 언젠가는 실행될 것이지만 매우 느리게 진행될 것이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