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만드는 유럽, ‘의무’를 논하는 한국
유럽 철강산업은 고도의 성숙기를 거쳐 저성장이 고착화 됐지만 친환경 철강과 관련한 정책에서는 어느 시장보다 앞서 있다.친환경 철강을 둘러싼 논의에서 유럽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기술이나 목표 수준이 아니다. 차이는 정책이 시장을 어떻게 대하느냐다. 유럽의 정책은 아직 미완성이지만 분명한 방향성을 갖는 반면, 한국의 정책 논의는 여전히 ‘의무화’와 ‘속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차이는 향후 철강 산업 경쟁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유럽의 친환경 철강 정책은 단계적이다. EU와 주요 회원국들은 저탄소 철강을 공공 조달과 산업 정책에 우선적으로 포함시키고 있지만, 이를 일괄적 규제로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산업가속화법(IAA)이나 국가별 녹색 조달 지침은 친환경 철강에 최소한의 수요 기저를 제공하는 장치에 가깝다. 정책의 역할은 시장을 ‘강제’하기보다 초기 시장이 형성될 수 있도록 ‘신호’를 주는 데 있다.유럽 정책이 완성형은 아니다. 표준화 된 라벨링이 부족하고, EU산 철강에 대한 명확한 우대 규정이 없는 점은 정책 효과를 제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정책의 특징은 명확하다. 기준을 먼저 만들고, 기업과 시장이 그 기준에 적응하도록 시간을 준다는 점이다. 완전한 무탄소 철강뿐 아니라 부분 탈탄소 철강까지 정책 프레임 안에 포함시키는 유연성은 이러한 접근의 연장선에 있다.반면 한국의 정책 논의는 상대적으로 경직돼 있다. 탄소중립 목표와 배출 감축 로드맵은 분명하지만, 철강 공정 특성과 기술 전환 속도를 충분히 반영한 ‘중간 단계’ 설계는 부족하다. 친환경 철강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나 배출량 산정 기준, 수입재와 국내산의 적용 방식 등 핵심 요소들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무화 논의가 먼저 등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이러한 접근은 산업 현장에 불확실성을 키운다. 기준이 불명확한 상태에서의 의무는 투자 판단을 어렵게 만들어 기업들이 ‘최소 대응’ 전략을 선택하게 만든다. 유럽이 계약과 약속을 통해 시장을 먼저 형성하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또한 유럽에서 퍼스트 무버스나 스틸제로와 같은 민간 주도의 이니셔티브는 정책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정부가 모든 기준을 정하지 않고, 산업과 수요자가 함께 조달 기준을 만들어가는 구조다. 이는 단순한 규제 대응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시장 질서의 일부로 인식하게 만든다.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유럽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완성된 해답’을 전제로 정책을 설계하기보다, 과도기를 인정하면서 시장 형성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접근할 필요는 있다. 부분 탈탄소 철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명확한 기준과 라벨을 통해 거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시장은 움직일 수 있다.친환경 철강 정책은 속도가 아닌 방향과 구조의 문제다. 유럽은 느리지만 시장을 만들고 있고, 한국은 빠르지만 시장이 보이지 않는다. 정책이 산업을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갈 수 있는 길을 닦아주는 역할을 할 때 친환경 철강은 규제가 아닌 경쟁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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