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급 상황 보면서 범용재만 팔아 수익 내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그 방식으론 앞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가격에만 의존하는 장사는 중국이 더 잘한다. 이제는 제품이 아니라 기술과 가치를 팔아야 한다. 산업이 바뀌고 시장이 바뀌었는데, 전략이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경쟁력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지금이 구조 전환의 마지막 기회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의 확산 속 국내 철강산업이 중대한 기로에 섰다. 중국산 후판에 이어 열연강판 등 범용 철강재에 대한 반덤핑 규제가 가시화되며 일시적인 숨통은 트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단기적 유예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철강업계가 과거처럼 범용재 판매에 의존하는 전략을 반복한다면, 한국 철강은 머지않아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변방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결국 생존을 위해선 고강도·고내식성·정밀 소재 등 고부가가치 기술이 집약된 스페셜티(specialty) 철강으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산업의 미래가 걸린 마지막 기회가 눈앞에 와 있다.
◇ 과거처럼 팔 순 없다…반덤핑 이후가 진짜 승부
과거 철강업계는 철강 호황기마다 범용재에 집중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기술 투자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은 후순위로 밀렸다.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이 시급하다는 공감대는 있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진입 장벽이 높았다. 수요업계는 새로운 소재에 대해 가격 민감도가 높고, 기존 공정과 호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입을 꺼려왔다. 기술 혁신이 반드시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는 구조는 기업 내부의 의사결정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신제품을 개발해도 고객사가 받아주지 않으면 결국 창고에 쌓일 뿐”이라며 “매출에 직결되지 않으니 내부에서도 ‘왜 쓸데없이 어려운 걸 하냐’는 시선이 따랐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단기 실적 중심의 문화가 여전한 상황에서, 고위험 기술 투자에 나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현장을 겪어본 사람들은 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철강업계 관계자는 “당시엔 수급과 가격이 받쳐주니, 범용 제품만 생산해도 수익성이 충분했다”며 “당장의 이익이 크다 보니, 장기적인 미래에 대한 고민 자체가 없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관계자는 “‘쉬운 길’에 익숙해진 산업 구조는 장기적인 체질 강화보다는 단기 수익에 집중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글로벌 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졌다”라고 꼬집었다.
최근 글로벌 보호무역 기조 속에 각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무역장벽을 높이고 있으며, 한국 철강업계 또한 후판과 열연강판, STS, H형강 등의 제품에서 중국산 규제를 진행 중이다.
철강업계는 지난 2월 무역위원회가 발표한 중국산 후판에 대한 잠정덤핑방지관세 부과와 열연강판에 대한 반덤핑 조사개시는 일시적인 수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반덤핑 등 무역장벽을 단순한 ‘숨통 틔우기’로 소비할 경우, 결국 구조적 한계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열연강판과 후판 등 중국산 범용재의 품질이 빠르게 상향되는 가운데 국내외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영향력을 더욱 넓히고 있다. 이미 일부 고급 강종에서조차 중국 기업이 기술 선점을 이루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어, 한국 철강업계의 위기감은 점차 고조되고 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문제는 이 같은 외부 변수에 의존한 생존 전략이 근본적인 해법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라며 “반덤핑 조치와 같은 무역구제 역시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관계자는 “무역장벽이라는 ‘유예기간’을 구조 전환 없이 지나친다면, 철강산업은 조만간 더 거센 파고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라고 부연했다.
◇ 범용재의 시대는 끝났다…스페셜티 전환이 철강산업 살릴 유일한 해법
철강업계 관계자들은 중국산 철강재에 대한 반덤핑 관세 등 강화되는 무역장벽을 산업 체질 개선의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본지와 만난 한 관계자는 “지금이야말로 철강산업이 체질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철강업계는 스페셜티 철강재로의 전환이 경쟁력 회복과 지속 가능한 성장의 핵심 전략이라고 보고 있다.
스페셜티 철강은 고강도·고내식성·경량화 등 첨단 기술이 집약된 고부가가치 소재로, 전통적인 범용재와는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는다. 세계적으로는 자동차, 조선, 에너지, 반도체, 우주항공 등 미래 산업을 중심으로 특수강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자동차용 초고장력강, 친환경 에너지 설비용 고성능 강종, 반도체 및 정밀기기용 소재 등은 이미 시장 수요가 형성되고 있으며, 향후 세계시장 내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분야다.
다만 이러한 분야는 고도의 기술력과 지속적인 연구개발(R&D) 투자가 전제돼야만 진입이 가능하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전통 제조업이라는 한계를 넘어, ‘소재기술 기반 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라며 “이를 위해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과 더불어, 기업들의 장기적 안목과 투자 결단이 병행되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과거처럼 단기 이익에 집중하는 경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라며 “스페셜티 기술 중심으로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국내 철강은 머지않아 글로벌 공급망에서 변방으로 밀려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