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10] 내진철근 '선택' 아닌 '필수'…건설 안전 패러다임 바꾼다

특집 2026-06-17

최근 전 세계적으로 지진 발생 빈도와 피해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건축물 안전성 확보가 건설 산업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내진설계가 기존에는 일부 대형 건축물에 한정된 개념이었다면 지금은 일반 건축물부터 국가 핵심 인프라까지 적용이 확대되며 구조물 경쟁력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국내에서도 경주·포항 지진 이후 내진 안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철근 시장 역시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단순 범용재를 넘어 지진 에너지를 흡수하고 붕괴를 지연시키는 안전 자재로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배터리 생산시설, 물류센터 등 안정성과 연속 운전이 중요한 첨단 산업시설 건설이 확대되면서 내진철근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2017년 포항지진 철근콘크리트 구조 피해 사례

■ 안전지대 인식 깨뜨린 경주·포항 지진

국내 지진 관측 건수는 점진적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는 지진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평가됐지만 2016년 경주 지진(규모 5.8급)과 2017년 포항 지진(규모 5.4급)은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당시 수많은 건축물에서 균열과 파손이 발생했으며 포항 지진은 국내 최초의 지진 특별재난지역 선포 사례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건축물 안전 기준 강화 필요성을 사회 전반에 각인시켰고 내진설계와 자재 적용 확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정부도 제도 개선에 나섰다. 1988년 최초 도입된 내진설계 의무 기준은 6층 이상, 연면적 10만㎡ 이상 건축물에만 적용돼 왔으나 포항 지진 이후 기준이 대폭 강화되면서 2017년부터는 2층 이상, 연면적 200㎡ 이상 건축물까지 범위가 확대됐다. 이는 국내 건설시장에서 내진자재 수요 확대를 이끄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일본과 미국 등 대표적인 지진 다발 국가에서는 이미 내진철근 사용이 사실상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은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이후 내진기준을 대폭 강화했으며 주요 구조물에 고연성 철근 적용을 확대해 왔다. 미국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엄격한 내진기준을 적용하고 있으며, 교량과 공공시설 건설 시 내진철근 사용 비중이 매우 높다.

국내 역시 최근 들어 글로벌 수준의 안전 기준 도입이 확대되면서 철근 시장 구조가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내진철근은 반복적이고 급격한 하중이 작용하는 상황에서도 취성파괴 없이 충분한 소성변형 능력을 확보해 지진 에너지를 흡수하도록 설계된다. 일반철근이 ‘버티는 힘’에 초점을 맞췄다면 내진철근은 ‘버티면서 변형되는 능력’까지 확보해야 한다. 이를 통해 건축물의 급격한 붕괴를 막고 대피 시간 확보가 가능해진다.

특히 지진은 순간적인 충격이 아니라 반복적인 진동 하중이 가해지는 특성이 있어 변형 능력이 구조 안전성을 좌우한다. 이 때문에 내진철근은 일반철근보다 엄격한 성능 기준이 적용된다.

대표적으로 항복강도 상한치를 규정해 철근의 항복 거동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구조 설계 신뢰성을 확보한다. 또한 인장강도 대비 항복강도를 1.25 이상 확보하도록 규정해 항복 이후에도 충분한 연성과 변형 능력을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내진성능 확보를 위해서는 단순히 철근 강도를 높이는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진 발생 시 구조물은 반복적인 진동과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강하지만 변형되지 않는 자재는 오히려 갑작스러운 파괴 위험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철근 개발 방향은 강도 경쟁보다 강도와 연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균형 설계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는 내진철근이 일반철근 대비 높은 기술 장벽을 가진 제품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 건물 대형화로 내진성능 중요성 더욱↑

최근 건설 산업은 초고층 건축물과 대형 인프라 확대에 따라 철근의 고강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다만 강도가 높아질수록 변형 능력이 감소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고강도 철근은 하중을 견디는 능력은 우수하지만 충분한 연성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지진 발생 시 취성 파괴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

이에 따라 SD500급 이상 고강도 철근 시장에서는 강도 확보와 동시에 내진성능을 만족시키는 기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SD600급 이상 고강도 철근에서는 내진성능 확보 여부가 제품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평가된다.

내진철근 생산은 일반철근보다 더욱 정교한 품질 관리가 요구된다. 화학 성분 조성부터 압연 공정, 냉각 조건, 열처리 기술 등이 복합 작용하기 때문이다. 항복강도 편차를 최소화하면서도 충분한 연신율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 공정 전반에서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국내 내진철근 시장의 제도적 기반은 2011년 'KS D 3688' 제정을 통해 마련됐다. 당시 고성능 철근콘크리트용 봉강 규격이 신설되면서 내진철근이 처음으로 KS 체계에 포함됐다.

이후 2016년 국가기술표준원은 내진성능 확보 필요성이 확대되자 내진철근 규격을 일반철근 규격인 KS D 3504에 통합 반영했다. 이 과정에서 SD400S와 SD500S가 특수내진용 강종으로 포함됐고 SD600S가 신규 강종으로 추가됐다.

이를 통해 내진철근은 기존의 별도 특수 규격을 넘어 일반철근 규격 체계 내에서 내진성능을 공식적으로 요구받는 핵심 구조 자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업계에서는 당시 KS 개정이 내진철근 시장 확대의 분수령이란 평가다. 규격 통합 이후 건설사와 설계사의 적용 편의성이 높아졌고 공공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채택 사례도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내진철근 KS 개정

■ 특허가 된 고부가 내진철근 기술

최근 내진철근 시장의 또 다른 화두는 특허다. 그간 철근은 범용 제품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내진철근은 제조 공정과 성분 설계, 강도와 연성 확보 기술 등이 복합적으로 요구되는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실제 현대제철은 2009년부터 관련 기술 개발에 착수해 2013년 국내 최초 내진철근 개발, 2015년 고강도 내진철근 개발에 성공했다.

현재 내진철근 관련 등록 특허 9건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국내 제강사들과 통상실시권 계약도 실시하고 있다. 단순 생산량 경쟁에서 벗어나 기술력과 지식재산권이 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향후에는 고강도 내진철근과 초고강도 내진철근 분야에서 기술 경쟁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내진철근 시장은 지난 10년간 빠르게 성장했다. 현대제철이 내진강재 브랜드 H CORE를 출시한 2017년 당시 시장 규모는 약 5,000톤 수준에 불과했으나 2023년 연간 50만톤 시장까지 성장했다. 특히 국내 철근 시장 전반이 건설경기 침체로 위축된 상황에서도 내진철근 비중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기 요인이 아니라 구조적 수요 증가에 기반한 성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내진철근은 최근 철강업계가 추진 중인 탄소중립 전략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건축물의 안전성과 수명을 높일 경우 재건축이나 대규모 보수 빈도를 줄일 수 있어 장기적으로 자원 사용량과 탄소 배출 저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ESG 경영이 확산되면서 건설사들도 구조물의 장수명화와 안전성 확보를 중요한 평가 요소로 반영하고 있다.

 

■ 데이터센터·공공 인프라 등 수요 확대 기대

앞으로 내진철근 시장 확대를 이끌 핵심 변수 중 하나는 AI 인프라 투자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 기업뿐 아니라 국내 기업들도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에 나서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서버와 전력설비 등 고가 장비가 집중된 시설로 지진 발생 시 피해 규모가 매우 크다.

특히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운영이 요구되기 때문에 일반 건축물보다 더욱 높은 수준의 구조 안전성이 요구된다. 실제 글로벌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들은 부지 선정 과정에서 지진 위험도를 주요 평가 항목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건축 단계에서도 높은 수준의 내진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과 배터리 공장 역시 마찬가지다. 설비 투자 규모가 수조원에 달하는 만큼 지진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하며 이에 따라 내진설계와 내진자재 적용 비중도 확대되는 추세다.

반도체 생산 공정은 미세 진동에도 민감해 건축물 자체의 구조 안정성이 중요하다. 지진 발생 시 생산라인이 중단될 경우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건설 단계부터 높은 수준의 내진설계가 적용된다.

배터리 산업 역시 대규모 생산설비와 위험물 저장시설이 함께 운영되는 특성상 구조물 안전 확보가 필수적이다. 특히 글로벌 배터리 기업들은 생산시설의 재난 대응 역량을 중요한 투자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어 향후 내진자재 적용 확대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의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 역시 내진철근 수요 증가를 견인할 전망이다.

교량과 철도, 터널, 항만 등 사회기반시설은 장기 사용을 전제로 설계되기 때문에 내진성능 확보가 필수적이다. 특히 노후 인프라 보강 사업과 도시재생 사업이 본격화될 경우 내진철근 적용 범위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추진 중인 도시재생사업 역시 새로운 수요처로 꼽힌다. 단순 재개발·재건축을 넘어 기존 구조물의 안전성 확보가 중요해지면서 보강 공사와 리모델링 시장에서도 내진자재 적용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건설사들의 인식 변화도 시장 성장의 중요한 배경으로 꼽힌다. 과거에는 내진설계를 법적 의무 충족 수준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브랜드 가치와 소비자 신뢰 확보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안전 기준을 강화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히 대형 건설사를 중심으로 고급 주거시설과 대형 복합개발 사업에서 내진성능을 적극 홍보 요소로 활용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업계 추정 내진철근 국내 수요

■ 향후 시장 전망은

현재 국내 건설경기 침체로 철근 수요 전반은 부진한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건설경기가 점진적으로 회복되면서 내진철근 수요 역시 연간 40만톤대 초반 수준을 회복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 첨단 제조시설, 공공 인프라 투자 확대가 더해질 경우 중장기 성장 여력은 더욱 커질 것이란 전망이다. 특히 정부의 안전 규제 강화 기조는 중장기적으로 내진철근 수요 확대를 뒷받침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건축물 안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설계 기준 역시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추세다. 향후 건축 관련 법규 개정 과정에서 내진기준이 추가로 상향될 경우 내진철근 적용 범위도 자연스럽게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초기 자재 비용이 다소 증가하더라도 장기적 안전성과 유지관리 측면에서 유리한 내진철근 채택 사례가 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변화가 향후 내진철근 시장 확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건축물 안전이 국가 경쟁력의 일부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내진성능 확보는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내진철근 시장은 단순한 철근 시장의 한 부분을 넘어 건축물 안전과 국가 재난 대응 역량을 결정하는 핵심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과거 철근 시장이 가격 중심 경쟁 구조였다면 앞으로는 안전성과 기술력, 품질 신뢰성을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비용 증가 요인으로 인식되던 내진성능이 이젠 건축물의 필수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며 "철근 산업 역시 범용재 중심 경쟁에서 안전성과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고부가 시장으로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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